이순신

16세기 조선의 무신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인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을 통솔했던 제독이자 구국영웅이다.

 

침략군과 교전하여 천재적인 활약상을 펼치고 중앙 지원 없이 자급자족을 해낸 군 지휘관이자, 휘하 장병들에게 원리원칙의 엄수를 강요했지만 높은 승률과 넉넉한 처우를 보장한 상관, 지방관 시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전시에도 그들을 위무하고 구제한 목민관, 고위 관료와 접선 및 축재를 거부하고 공정과 절제를 중시한 인격자, 자신이 관할한 지역의 백성과 병사에게 각종 사업을 장려하여 많은 수효를 얻어낸 행정가, 그리고 왕을 위시한 조정의 핍박으로 해임되어 사형수가 되거나 후임자의 실책으로 군사·군선들을 거의 상실하거나 어머니와 아들을 잃는 등 많은 수난을 겪고도 명량 해전 등에 임하며 굴하지 않은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로부터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한국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이순신 전용 시호로 인식한다.

 

이순신은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형태의 폭력인 전쟁이라는 상황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여러 사람들의 질시와 모함을 받아 파면당하고, 관리로서 받은 조정의 비합리적인 처우 등, 앞으로는 왜군과 싸우며 뒤로는 조정과 임금이라는 내부의 적과 맞서 홀로 버텼다. 또한 어머니와 아들까지 연이어 전시에 잃고, 설상가상 자신이 모든 걸 쏟아부어 육성한 정예군이 거의 궤멸 수준으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수십 배의 적군에 맞서 출전이 곧 죽음임이 확실시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 결국 이겼다. 이순신은 이처럼 자신이 처한 참담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이상과 펼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보여준 위대한 인물로 심지어 적국인 일본조차 이순신을 동경하고 사당을 세울 정도였다.

 

이순신은 웃음이 적고 행동이 단아했으며 좌절과 포기를 모른 채 자신의 사명에만 충실하여 전장에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탐관오리들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자 높으신 분들과 뇌물을 주고 받는 동안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무관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원칙적인 성향과 굉장히 청렴한 성격 탓에 당시 상사들과 갈등이 많아 임진왜란 전에는 인사 이동이 자주 있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 이순신은 사람이 갈망하는 권위나 권력같은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념으로 매사에 임하는 사람으로, 그는 전장에서 싸우다 죽던 순간까지 누구의 인정과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헌신하였으며,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 가령 명량 해전의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가량을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일개 병졸 하나하나의 공을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대표적으로 명량 대첩 때 자신의 공로를 안위에게 준 것이 있는데 그 덕에 안위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허나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하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으며, 심지어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린다고 할 수 있겠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이 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요소 중 하나다.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Admiral Yi Sun-shin